현실을 베이스로 한 블랙 유머, 그 속에 숨겨진 한국 사회의 초상
《어쩔 수가 없다》는 일자리 경쟁과 중년 가장의 생존 문제를 중심에 둡니다. 원작 『The Ax』가 해고된 중년 남성이 경쟁자를 제거하며 일자리를 되찾으려는 블랙 유머적 설정이었다면, 박찬욱 감독은 이를 한국의 고용 불안, 가족의 책임, 도덕적 파산이라는 사회 문제와 결합해 더욱 현실적인 스릴러로 재해석했습니다.
영화 속 주인공 '유정우(이병헌)'는 구조조정으로 직장을 잃고, 오랜 시간 재취업에 실패한 중년의 가장입니다. 그는 온라인 커뮤니티를 통해 같은 분야 경쟁자 명단을 확보한 뒤, 그들을 몰래 관찰하고, 제거해 나가는 과정을 냉소적이고 건조한 시선으로 그려냅니다.
박찬욱 감독은 이 과정을 지나치게 비극적으로 연출하지 않고, 오히려 삐뚤어진 논리와 체념 섞인 블랙 유머로 치환합니다. 정우가 첫 희생자를 만나는 장면에서 그는 **정장을 입고 거울을 보며 '이것도 일종의 면접이다'**라고 혼잣말을 하죠. 이 대사는 웃음을 유발하면서도, 극단적 경쟁 사회에 대한 날카로운 풍자로 작용합니다.
이처럼 영화 전반에 걸쳐 현실적인 디테일이 가득하면서도, 한 발 떨어진 박찬욱 특유의 아이러니한 연출과 철학적 거리두기가 돋보이며, 단순한 범죄극을 넘어선 메시지의 깊이를 선사합니다.
이병헌의 절제된 폭발력, 인물에 스며든 광기와 체념
이병헌은 이번 작품에서 또 하나의 인생 캐릭터를 만들어냈습니다. 그가 연기한 유정우는 겉보기엔 평범한 가장이지만, 영화가 전개될수록 점차 정당성을 잃어가는 인물, 즉 윤리와 현실 사이에서 균열을 일으키는 인간으로 그려집니다.
이병헌은 평소의 카리스마 넘치는 모습보다 훨씬 더 내향적이고 음침한 에너지를 활용합니다. 그의 연기는 폭발보다는 압축, 표현보다는 은폐에 가깝습니다. 특히 정우가 경쟁자를 하나하나 만나기 전의 침묵과 무표정, 그리고 실행 후의 무감정한 태도는 도덕이 무너진 인간의 공허함을 완벽히 표현합니다.
정점은 영화 후반부, 손예진이 연기한 아내 ‘민정’과의 대화 장면입니다. 민정은 남편의 변화를 직감하지만 직접 묻지 않고, **“이제 좀 살 것 같아?”**라는 단 한마디로 그를 바라봅니다. 이병헌은 대답하지 않으며 그저 웃음과 눈물 사이의 묘한 표정을 지을 뿐입니다. 이 짧은 순간이야말로, 영화 전체의 감정선을 요약하는 명장면입니다.
이병헌은 이 영화로 단순한 연기를 넘어, 사회 구조 안에서 피폐해지는 인간의 초상을 자신의 몸으로 구현해냈습니다.
박찬욱의 세계관, 이 영화로 또 한 번 확장되다
박찬욱 감독은 항상 인간의 양면성, 폭력의 구조, 그리고 개인과 시스템의 충돌을 작품 전면에 배치해왔습니다. 《복수는 나의 것》, 《올드보이》, 《친절한 금자씨》를 거쳐 《아가씨》, 《헤어질 결심》까지 이어지는 그의 세계관은, 미학과 도덕 사이의 팽팽한 줄타기로 요약할 수 있습니다.
《어쩔 수가 없다》는 이 연장선 위에 있으면서도, 한층 더 현실에 가까워진 작품입니다. 초현실적 복수극이나 시대극이 아닌, 지금 이 사회를 살아가는 사람들의 이야기이기 때문입니다. 그 결과 관객은 이 영화가 더 이상 ‘남의 이야기’가 아니라, **‘우리 모두가 마주한 혹은 마주할 수 있는 이야기’**라는 점에서 더 깊은 불편함과 공감을 동시에 느낍니다.
또한 박찬욱 감독은 이번 작품에서 잔혹함을 미화하지 않으며, 오히려 그 속에서 희극적 요소를 일부러 배치함으로써 현실의 기괴함 자체를 드러내는 방식을 택합니다. 그는 “진짜 잔혹한 사회는 피를 보이지 않는다”는 철학을 연출 전반에 녹이며, 블랙 코미디라는 장르적 외피를 통해 도덕의 경계가 흐려진 시대를 말하고자 합니다.
‘어쩔 수 없다’는 말은 단순한 변명이 아니라, 현대인의 집단적 자기합리화이자 회피의 언어입니다. 이 반복되는 대사를 통해 영화는 불편하지만 정직한 질문을 관객에게 던집니다.
"정말 어쩔 수 없었을까?"
결론
《어쩔 수가 없다》는 박찬욱 감독이 선보인 가장 현실적인 스릴러이자, 가장 날카로운 풍자극입니다. 이병헌의 연기, 박찬욱의 연출, 원작의 사회비판적 주제, 이 세 요소가 완벽히 융합된 이 작품은 단순한 흥미를 넘어, 관객 스스로를 성찰하게 만드는 강력한 힘을 지닌 영화입니다. 당신도 이 작품을 보고 난 후, 어쩌면 스스로에게 묻게 될 것입니다.
“나는 지금, 어떤 선택을 하고 있는가?”